불안과 함께 신실하게 살아가기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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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함께 신실하게 살아가기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불안”의 여섯 번째 글입니다.

불안은 혼란스럽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구급차 뒤에 실린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불안과 염려로 심신이 쇠약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평안히 잠자리에 들기 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으로 인해 일시적인 불안을 경험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불안으로 인해 일상의 기본적인 업무 조차도 처리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에게 불안은 그저 1년에 몇 번 정도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 생활을 심각하게 방해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불안이 어떤 형태를 띠건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불안정한 우리의 마음을 위해 성경적인 관점으로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불안이 그 추한 머리를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불안과 염려가 지속적인 동반자라면, 우리는 어떻게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고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싸움 혹은 도피 본능은 훌륭하다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잠재적인 위험을 경고하도록 우리의 뇌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효과들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의 위험 감지 시스템은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염려와 불안이 마태복음 6장에 주어진 명령과 적실한 약속들에 주의를 기울이는데 실패한 결과는 아니다. R. C. 스프로울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주님을 믿지만 염려에 빠지며 때로는 우울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우리는 몸과 영혼을 가진 피조물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합적이며 복잡한 존재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것을 희생하면서 영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방식이 아니며(참고 왕상 19장, 딤전 5:23), 우리 또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끔찍한 교통 사고에서 겨우 살아남아 다시 차를 운전하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는 한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가 겪고 있는 악전고투는 육체적인 것인가 영적인 것인가? 대답은 둘 다이다. 육체를 가진 영적 존재들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자연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과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우리의 육체적 경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과학적 탐구로 얻은 통찰들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불안이나 우울과 같은 상태들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의 경우 인지적인 분열과 뇌 신경 회로의 오작동 경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염려와 불안의 육체적, 영적 원인들의 특정한 조합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 목적을 위해, 이 글은 불안과 더불어 분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 불안과 더불어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불안 속에서 주님의 구속적인 목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불안과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 불안,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은 종종 몸에 해로운 생활 습관들(예를 들어, 불규칙적인 식사, 운동이나 수면 부족), 무분별한 사고 패턴들(예를 들어,  자기 연민, 무익한 생각, 억제되지 않은 감정) 그리고 훈련 부족(예를 들어, 게으름, 고립). 리처드 벡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도 쉽사리 그리고 빈번하게 그들의 무절제한 사고 패턴이나 억제되지 않은 감정들로 인해 그 우울증에 더 깊숙이 빠져든다.” 불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경각심을 늦춰서는 않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우리는 우리의 사고 패턴들(고전 4:20; 빌 4:8), 생활 습관들(딤전 4:16) 및 가르침의 영향들(딤후 4:3-4)에 주의 깊에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기도에 전념하고(빌 4:6), 자기 절제(고전 7:5; 9:25; 갈 5:23)와 근신(고전 9:27; 딛 1:8)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요일 3:20). 찰스 스펄전은 자신이 직접 근심과 절망의 시기를 통과한 후, 자신의 청중들에게 감정은 불안정하고 변덕스럽다는 것을 종종 상기시켰다.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오늘은 행복하겠지만 내일은 불행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불청객처럼 우리 안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감정과 생각들에 대한 해결책은 그저 우리의 감정을 바꾸고, 이 불쾌한 불안감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바꾸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신실한 순종만이 답이다. 때때로 그 신실한 순종은 청하지도 않은 감정과 생각들의 초연한 구경꾼이 되는 것을 배우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한다. 우리의 감정과 상관 없이 하루 하루 신실한 발걸음을 내딛는 이러한 종류의 신실함은 힘든 여정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날 닥칠 일들 – 끊임없는 이메일, 잠재적인 나쁜 소식들, 단조로운 업무들, 궁핍한 자녀들, 미납금 청구서 – 을 미리 고심하면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힘겨운 씨름을 할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한 번에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을 우리는 신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말씀하신다. 때때로 문제는 그 일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우리는 나아갈 따름이다.  

“시편은 염려로 가득찬 영혼이 자주 찾는 정원이 되어야 한다.”

심각한 염려와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는 믿음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고통스러운 불확실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특별히, 불안으로 인한 고뇌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통 가운데 계신 구주와의 신비로운 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틴 루터는 사탄이 자신의 양심을 고발하는 감정적인 동요와 혼란의 시기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는 자신을 상상하곤 했다. 루터는 악한 자의 불화살과 고통스럽게 치솟는 불안감은 우리 구주와의 연합 속에서 함께 고통 당하며, 옛 자아의 잔재들을 죽이고, 통제와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필요와 집착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다. 파괴적인 염려와 불안의 고통스러운 맹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공포에 투항하는 대신에, 우리 지성의 반응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마음이 잠잠히 하도록 상기시킨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우리는 절제하고 삼가하며, 확고한 태도를 유지한다. 옛날 찬송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폭풍우 비바람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 주님께서 이 생에서 온전한 안식을 주시든 주시지 않든 관계 없이, 우리는 우리의 불안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기 위해 분투하고, 불안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도록 허용한 것을 회개하기 위해 애쓴다. 

확실히, 어떤 염려와 불안들이 죄인지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청교도 존 플라벨은 간단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공한다: “두려움이 당신으로 하여금 깨어 기도하게 하는 한…그것은 당신의 영혼에 유익하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낙심케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죄이며 사탄의 덫이다.” 이에 덧붙혀서, 우리는 어떤 생각과 감정을 참된 진리값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점검해야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서 염려와 불안을 얻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 염려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는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 일시적인 안위를 얻으며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애쓰면서 그저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우리의 계획에만 맡겨 놓게되면, 우리는 음식, 기술, 물질적인 부 혹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 속에서 불안이라는 태풍으로부터의 안식처를 찾으려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내면의 경향성들 – 회피적인 행동들, 집요하고 쓸데 없는 망상, 끊임없는 정신부검 혹은 자조적인 기술들 – 에 굴복한다면, 불안을 알리는 경보기 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말씀이 필요하다. 

존 오웬이 제안한 것처럼, 지속적인 불안은 약속과 정면으로 맞부딪혀야 한다:

“오랫 동안 마음의 어려움과 불안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힘겨웠던 한 가련한 영혼은 달콤한 약속을 발견하고 – 그의 모든 필요에 합당한 약속으로, 그를 용서하시기 위한 자비로 오시며, 그를 품에 안으시기 위한 사랑으로, 그를 깨끗게 하시기 위한 보혈로 오시는 그리스도 – 이 약속에 어느 정도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일어난다.”

당신은 염려와 불안이 엄습해 와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두려움 속으로 빠져드는가? 시편 기자는 더 좋은 경로를 모델로 삼는다: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 사실, 시편은 염려로 가득찬 영혼이 자주 찾는 영혼의 정원이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아타나시우스는 시편을 작은 성경이자(루터의 전조) 인간의 모든 가능한 감정들의 목차(칼뱅의 전조)라고 주장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친구였던 마스셀리누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시편에서 자네는 자네 자신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네. 그 안에 묘사된 자네 영혼의 모든 활동과 변화들, 모든 기복과 실패 그리고 회복들을 발견하게 되지.” 염려와 불안의 거친 폭풍이 몰아치기 전이나 세차게 쏟아붓는 와중에도 우리는 시편을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편은 우리의 모든 감정과 정서에 친숙하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정서적 자질들을 왜곡시키고 사탄은 그러한 왜곡들을 이용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편의 공감적인 조언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탁월함에 대한 적절한 갈망은 완벽주의로 바뀔 수 있고, 책임감은 과도한 책임감으로 바뀔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유일무이하게 보살필 수 있도록 어떻게 엄마들을 창조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갓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초보 엄마는 아기가 울 때마다 엄청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과도한 책임감과 두려움의 무게로 인해 엄마들을 낙담과 절망으로 빠르게 몰아넣을 수도 있다. 시편은 그런 불안하고 억눌린 마음을 가진 엄마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보좌에서 백성들을 돌보고 계시며, 모든 상황들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치료제와 같다(참고 시 121:3-4).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봄은 성경의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과도한 염려를 금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돌봄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일들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걱정은 우리가 누구를 진심으로 신뢰하는지를 폭로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공중의 나는 새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향하게 하신다. 만약 주님이 공중의 나는 새들도 그렇게 잘 돌보아 주시고, 솔로몬이 입은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입게 하신다면, 그분이 우리의 필요 또한 공급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마 6:28-30; 참고 롬 8:32).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과도한 세상적인 염려는 무익한 것임을 상기시키신다(마 6:27). 그러나 칼뱅이 언급한 것처럼 주님의 금지는 위로가 담긴 대안을 함께 수반한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일과 염려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적절히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고유한 평안을 즐겨도 좋다.”   

섭리라는 한 단어 속에 미열처럼 계속되는 불안과 더불어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담겨 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섭리를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27문답)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손길로부터 온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우리를 마비시키는 두려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만약 적절하게 틀이 잡히고 다루어진다면, 염려와 불안은 모든 위로의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의 따뜻한 사랑의 교제를 키워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후 1:3-4). 리처드 십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만약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의 고통들이 무엇으로부터 오는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 문제 속에서 누그러질 뿐만 아니라 부드러워지고 거룩하게 되는지를 묵상한다면, 어떻게 그것들이 가장 불편해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통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가 겪고 있던 고통 즉,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기를 거절하신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은 바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의 종을 위로해 주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리하여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기쁨으로 자랑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약한 것들…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고통스러운 올무는 사도 안에서, 사도를 통하여 섭리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했다. 우리의 연약함 또한 주님을 위한 더 큰 사랑과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혐오로 이끌어줄 수 있다. 플라벨은 끊임없이 염려하고 낙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소망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은혜로운 목적과 쓰임을 위해 이러한 고통을 그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고통을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더욱 부드럽고, 조심성 있고, 주의 깊고, 세심하게 만드시며, 가능한 한 많은 문제의 상황들을 피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길을 잃지 않도록 막아주는 하나의 장벽과 같습니다. 큰 시련 속에서, 올무처럼 보이던 것은 이제 여러분에게 유리한 장점이 될 것입니다.” 

유리한 염려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첫째, 플라벨은 계속해서, “몸의 질병들과 마음의 고통들은 이 세상의 위로와 즐거움들이 당신에게 쓴 맛이 나도록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 여러분 각자에게 인생이 그 자체로 소망할 만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 세상의 즐거움과 달콤함을 즐기는 여러분에게 삶을 더 힘겹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은 죽음을 수월하게 하고 여러분이 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을 쉽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등 뒤에 메달아 끌고 있는 그 무거운 장애물 때문에 삶은 지금 여러분에게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그의 섭리 안에서 여러분의 유익이 되게 하시는 방식으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십니다.” 둘째, 불안과 염려는 우리를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귐으로 이끌어 준다: “여러분의 위험이 더 클수록, 더 빈번하게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작은 문제들을 짊어지기 위해 여러분을 떠받쳐줄 영원하신 팔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비록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입니다.” 셋째, 바울이 가르치듯이, 주님은 약함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플라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이 여러분을 낙담치 않게 하십시오. 자연의 약점들은 죽음을 덜 무서운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것이며,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시간에 그의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한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의 직관과는 정반대로, 삶의 무게로 인해 쉴새 없이 엄습해 오는 불안과 염려에 대한 전망을 좋은 기회로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은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돌파구이다. 불안과 염려가 많아질수록, 우리를 위해 권고하시는 전능자에게 그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진다(벧전 5:7). 존 번연은 “오늘날”까지 마음의 염려와 불안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자서전을 다음과 같은 호기심 어린 전망으로 결론 내린다. 

“나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보고 느끼며, 그것들로 인해 괴로워하며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나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허락하신다.  1. 그것들은 나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다. 2. 그것들은 내가 내 마음을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 3. 그것들은 나에게 모든 내재적인 의의 불충분성을 확신시켜 준다. 4. 그것들은 내가 예수께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5. 그것들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나를 압박한다. 6. 그것들은 내가 주의하고 절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7. 그리고 나를 자극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도우시고, 이 세상 사는 날 동안 나를 인도하시도록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이 위대한 영국의 청교도가 자신의 회고록을 승리와 정복의 언어로 마무리 짓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가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구세주 또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 

루터와 스펄전처럼 번연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고통과 연약함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열렬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롬 8:28). 고통스러운 염려와 불안은 번연이 예수께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고,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히 4:15), 목자가 되시어 우리를 인도하시며(시 28:9; 사 4:11),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충만한 은혜를 보이시는 분이시다(고후 12:9).

염려와 불안이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든 아니면 지속적인 동반자이든, 우리는 이 전투에서 혼자가 아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시 94편). 주님은 그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시며, 연약하고 깨어진 심령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실 것이다(시 34:18). 그러니 서로를 권면하고(살전 5:11), 서로에게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 10:24) 서로의 짐을 지고(갈 6:2), 두려움, 불안 및 우울과의 싸움은 마침내 끝날 것임을 서로에게 상기시키도록 하자.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하고, 절제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 분투한다. 불안으로 야기된 마음 속 깊은 곳의 근심은 먼 기억이 되고, 또한 죄악된 불신의 잔재들 또한 그렇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에는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밤 그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계 21:4; 22:5).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애론 게리엇
애론 게리엇
애론 게리옷(Aaron L. Garriott) 목사는 테이블톡 메거진의 편집장이자 플로리다주 샌포드에 있는 레포메이션 바이블 칼리지(Reformation Bible College)의 상주 겸임교수이자 미국장로교(PCA)의 강도장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