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 개혁은 왜 필요했을까?
2023년 10월 26일
자존성과 단순성
2023년 10월 28일종교 개혁은 왜 여전히 중요한가?

2016년 10월 3일, 프란시스 교황은,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시점에 개신교와 카톨릭은 이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던 논쟁과 불일치를 넘어서 우리 역사의 중대한 순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로, 종교 개혁이 마치 사소한 일로 인해 벌어진 불행하고 불필요한 말다툼이었으며 이제 우리가 어른이 되었기에 옆으로 밀어두어도 좋은 유치한 감정의 발산이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루터에게 말해 보라.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재발견했을 때 해방감과 기쁨을 맛보고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가 완전히 다시 태어났으며, 열린 문을 통해 낙원 그 자체로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 사실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에게 말했다면 그는 이 진리가 그로 하여금 “노래하며, 춤추며, 기뻐 뛰게 할” 정도로 “너무나도 기분 좋고,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라고 했을 것이며, 토마스 빌니(Thomas Bilney)에게 말했다면 그는 “내 상한 뼈들이 기뻐서 펄쩍 뛸 정도로 이 진리가 그에게 놀라운 위안과 평안”을 준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은 분명 자신들이 젊은이들의 치기 어린 싸움을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발견한 것이었다.
1517년 당시의 좋은 소식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은 대략 천 년 동안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없었다. 그래서 토마스 빌니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 1:15)라는 말씀을 결코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 대신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구원을 스스로 얻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인식 속으로 내던져졌다. 당대의 교사들 중 한 사람이 표현하기 좋아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거절치 않으실 것이다.”라는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격려의 말이 의미했던 것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의문을 남겼다. 당신이 진짜로 최선을 다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구원 얻을 만한 공로가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난 500년 동안 종교 개혁이 가져다준 통찰의 미덕이나 적실성 중에 그 어떤 것도 퇴색되지 않았다.”
마틴 루터는 확실히 노력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좋은 수도사였고, 금욕적인 훈련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는 수도사가 존재한다면, 내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 정도로 나의 규율을 엄격히 지켰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내 양심은 내게 확신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상 의심했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것을 옳게 행하지 않았어. 너는 죄를 충분히 뉘우치지 않았어. 너는 그것을 고해성사에서 빠뜨렸어.’ 내가 인간의 전통들로 , 불확실하고 연약하며 불안한 양심을 치료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나는 날마다 더 불확실하고, 더 연약하고 더 불안해졌다.”
로마 카톨릭주의에 따르면, 루터가 천국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은 그릇된 가정으로 여겨졌고, 그것은 1431년 잔 다르크의 재판에서 그녀에게 제시된 혐의들 중에 하나였다. 그때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이 지상의 여정에서 그 어떤 순례자도 그가 영광을 얻기에 합당한지 혹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지 알 수 없으며, 그것은 주권적인 심판자만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여인이 마치 자신이 이미 영광에 참여하기라도 한 것처럼 낙원으로 받아들여졌음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 판결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완벽히 타당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능하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개인적으로 합당해졌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논리의 연장선 상에서, 나는 나의 결백함을 확신하는 만큼만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젊은 마틴 루터가, 가까이 있던 한 학생이 폭풍우 속에서 벼락에 맞았을 때 두려움으로 소리질렀던 이유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은혜로운 구원에 관한 지식,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이 무서웠다. 그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성경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재발견했을 때, 마치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선 것같은 자유함을느꼈던 이유였다. 그 후로 그는 모든 불안과 두려움 대신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마귀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집어 던지며, 우리가 죽음과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죽음과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선고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나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보석해 주신 분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이 계신 곳에 나도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 개혁이 사람들에게 설교와 성경 읽기에 대한 영적인 미각을 갖게 만들었던 이유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되, 그들이 얼마나 잘 회개했느냐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전적인 그분의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좋은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은 종교적 죄책으로 인한 잿빛 세상에 지중해의 태양 빛이 부서져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2017년의 좋은 소식
지난 500년 동안 종교 개혁이 가져다준 통찰의 미덕이나 적실성 중에 그 어떤 것도 퇴색되지 않았다. 동일한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인간의 절망과 행복에 있어 여전히 중요하다. 내가 죽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칭의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했듯이) 의로운 신분 상태의 선물인가 아니면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듯이) 더 거룩해지는 과정인가? 나는 나의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께만 확실히 의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나의 구원은 거룩함의 성취를 위한 나의 노력과 성공에 의존하는가?
종교개혁을 우리가 지나쳐야 하는 역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종교개혁이 당대의 어떤 문제에 대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더 명료해진다.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과 그 부패에서 벗어나고 하는 단순히 부정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보존해 준다. 만약 종교 개혁이 5백 년 전의 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복음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프로그램으로써, 종교개혁은 끝날 수 없다.
또 다른 반대는 오늘날의 적극적 사고와 자존감의 문화가 죄인이 의롭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모두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털 셔츠(역주: 과거 종교적인 수행을 하던 사람들이 벌거벗은 몸에 입던 거친 모직 옷)를 두르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거룩한 재판장 앞에서 죄책감으로 고통받던 루터의 문제는 16세기의 문제로 치부되며,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그의 해결책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하지만 사실 루터의 해결책이 그토록 행복하고 적합한 소식이라는 울림을 주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바로 이 맥락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유죄일 수 있음에도 불고하고 그분의 칭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내버렸기 때문에, 우리 문화는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 죄책감이라고 하는 옛 문제에 굴복하고 말았으며, 그 문제에 대답할 방법이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면 더 많이 사랑받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에 의해 폭격당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행위의 종교이며,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개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을 담고 있다. 루터는 영광스러우면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햇살이 어둠을 가르는 듯한 말씀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기뻐하시는 것을 찾지 않고,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흘러넘치며 선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사랑받기 때문에 매력적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매력적이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합니다.”
“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과 그 부패에서 벗어나고 하는 단순히 부정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다시 한번, 때가 무르익다
5백 년이 지난 지금,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여전히 개혁되지 않았다. 많은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신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온건한 교회 일치적 언어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여전히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거부한다. 성경이 교황, 공의회 및 교리가 따라야만 하는 최고의 권위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느껴진다. 성경이 그렇게 격하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은 권장되지 않으며, 수백만의 가엾은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가로막혀 있다.
로마 카톨릭주의 밖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보통 중요하지 않거나, 비뚤어진 생각이나, 당혹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외면당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이 칭의라는 용어로 의미했던 바에 대한 몇몇 새 관점들은 특별히 개인적인 회심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루터가 포기되거나 타협될 수 없다고 말한 그 조항을 버림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은 칭의나 혹은 그것을 선포하는 성경의 최고 권위에 대해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역사책들 속에 나오는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궁극적인 자유에 관한 유일한 메시지이며, 인간을 활짝 펴진 깃발처럼 휘날리며 번성하게 만드는 가장 깊은 능력을 가진 메시지이다. 그것은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주고, 하나님을 매수하려는 죄인들을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성도들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오늘날, 이 좋은 소식을 전파할 기회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5백 년 전, 인쇄기라는 구텐베르크의 최신 발명품은 복음의 빛이 이전에 증거되어 본 적이 없는 속도로 전파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틴데일의 성경과 루터의 소책자들은 수천 부씩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구텐베르크의 순간을 가져다주었고, 동일한 메시지를 루터는 상상도 못 할 만한 속도로 전파할 수 있다.
필요와 기회 모두 5백 년 전 만큼이나 크다. 사실 그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종교 개혁자들의 신실함을 보며 용기를 내자. 그리고 그들과 동일하게놀랍고 원대한 복음의 비전을 품자. 왜냐하면 그 복음은 죄의 어둠을 쫓아내는 데 있어서 그 영광이나 능력을 조금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