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catholic)”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5년 01월 12일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예배
2025년 01월 21일“사도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충격 받지 않길 바란다. 기독교 교회는 1960년대 (히피족)예수쟁이들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또한 빌리 그레이엄에 의해 설립된 것도 아니고, 백년 전으로 올라가 찰스 피니에 의해 설립된 것도 아니다. 제1차 대각성 운동 때에 조나단 에드워즈나 조지 휫필드에 의해 설립된 것도 아니다. 교회는 이미 15세기 동안 존재했었고,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그것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교회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첫 번째 가정만큼 오래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칼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이스라엘 가운데 교회가 유아 형태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도들에게 주님을 따르라고 부르셨을 때 설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것을 상고할 때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지점이다.
비평적 성경 연구를 주도하는 그룹에서는, 교회를 메시아가 필요한 예배 공동체로 생각하는 것이 유행이지만(최초의 기독교인들이 순회 묵시적 선지자[예수]를 그러한 지위로 승격시켰다고 가정한다.), 성경의 계시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교회는, 예수님이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시고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가 약속대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들이 실망감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게 된 열성파 그룹의 조직적 천재성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대신, 성경은 부활하신 구세주가 첫 부활절에 그의 택하신 증인들에게 나타나 교회를 세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성 금요일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에 대한 최종 승리였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께 실망한 추종자들이 그들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조직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설립하셨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무 배경 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명확해진다. 우리 주님의 부활의 현현은, 예수님이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약속된 그분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주는 삼 년간의 메시아 사역을 배경으로 벌어진다. 오순절(사도행전 2장)은 교회의 공식적인 생일로 여겨지며, 이는 우리 주님의 모든 약속의 정점이며, 주님의 메시아 사역을 배경으로 할 때만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이 유아기 교회를 품고 있었을지라도, 계속 진행되는 구속사는 그 유아기의 교회가 언젠가 성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때가 차서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태어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갈 4:4-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신 직후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마태복음 4장 23절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국의 복음의 선포와 우리 주의 기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확인은, 마침내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중요한 징표이다. 구속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모세 시대 경륜과 유대 민족주의의 제약을 받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이제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 모든 인종, 국가, 언어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이 시작된 직후,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 파송하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마태복음 10장 5-42절에 정의된 왕국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한다. 왜 이 열두 명을 부르셨을까? 그리고 왜 이 메시지를 전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을 위해 보내졌으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성들을 돌아다니는 사실만 고려하면 된다. 열두 제자가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복음 전도자로 임명받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수십 년 전의 교회 설립을 돌아본다. 바울은 그 교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도들과 선지자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냥 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그 복음은 훗날 바울이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로 정의되는 메시지다(고전 15:1~8). 열두 사도의 부르심과 복음 전파의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동일한 복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옥의 문이 그분의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같은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다(마 16:13-20).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다른 사도들과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서 주신 열쇠를 사용하여 교회의 교리와 실행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함께 모였다(행 15:1-21). 우리가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교회가 그 창설자이신 예수님의 권위를 행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위해 부름을 받고 위임된 직분자들을 통해 그것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사도행전 6:1-7; 20:17; 에베소서 3:2-7; 디모데전서 3:1-15).
마침내,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고, 성례를 행함으로써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보존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때때로 상황이 암울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그의 교회를 지키실 것이다. 노아의 시절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백성은 단 8명밖에 없었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신자의 수는 겨우 7천명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회에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미래는 다를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도행전 2장 41절에서 읽은 대로 오순절 날만 약 3천 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수는 5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행 4:4). 요한계시록 7장 9절에서는 흰옷을 입고 보좌 앞에 서 있는 무리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셀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민족들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들 모두 같은 것을 고백한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예수님은 그의 사도들을 부르셔서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셨고 묶고 풀 권한을 주셨다. 이제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부재 중인 집주인이 아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교회가 사도적이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속한 교회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직접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교회의 형식적인 구조는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베드로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교황들의 계보를 추적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복음이, 우리가 오늘 전하는 것과 같은 복음이라는 의미이다. 이 복음은 남성과 여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초대한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묶고 풀 수 있는 권한을 주며, 예수님이 그의 첫 번째 사도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교회 안에서 우리 주를 섬기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이 사도적인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우리 주님의 호의와 보호하심,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도적이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이 글은 원래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