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sola gratia)’ 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3년 05월 14일불가항력적 은혜란 무엇인가?
2023년 05월 20일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종교 개혁가의 시대이든 현시대든, 어떤 시대에 살고 있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우상으로 더럽히려는 유혹을 받는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우상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다… 교만과 대담함으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신을 상상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기독론에 어두운 그림자를 덮고 있던 교회의 문제를 발견하면서 종교 개혁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라는 교리를 부각시키게 되었다. 교회의 문제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특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개혁자들에게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가리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개혁자들은 이 문제를 명확히 파악하고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강한 교회의 문제
16세기 초에 교회는 서유럽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받은 자의 무리(Company of the Saved)”에서 “구원 회사(Salvation Company)”로 바뀌었다.
“구원 회사(Salvation company)”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 제도의 노예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신분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대신 교회를 의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로 인해 가톨릭교회 안에 은혜의 창고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사제들만이 은혜를 나눠주는 유일한 분배자였고 신자들은 그들에게 나아와야 했다.
1520년에 루터는 그가 쓴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교회의 성례전적 체계를 공격하였다. 이 책에서 루터는 이런 체계가 스스로 ‘바벨론’에 포로가 된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요람에서 무덤까지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고, 청년으로 견진성사를 받고, 장성한 사람으로 결혼하고, 임종 시에 병자 성사(病者聖事, extreme unction)를 받았다. 서품과 함께 각각의 이런 성례를 사제가 집행할 때, 은혜를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에 더해서, 사제에게 정기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과 사제 미사를 통해 성찬례를 받는 두 개의 추가 성례로 부여된 은혜를 일생 동안 보충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기독교인은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 가톨릭교회에 의존했고 성례에 속박되어 있었다.
루터는 성경을 의지했고 오직 두 가지 성례만을 확인했다. 그는 초점을 가톨릭교회와 성직자들에게 부터 오직 그리스도께로 옮기도록 가르쳤다. 구원은 은혜의 수도꼭지를 틀고 있는 사제의 무리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다.
이런 화려한 성례전의 베일이 벗겨지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을 수도 있었다. 가톨릭교회가 뭔가 매우 잘못되었다면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그들을 어디로 향하게 했을까?
각각의 솔라(solas)는 첫 번째 솔라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의존한다. 오직 성경에서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도시 교회(Stadtkirche)에는 루터가 강단에 서서 설교하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그는 검지손가락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루터가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로마 가톨릭 체제 전체와 맞서는 것이었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인간이 만든 전통의 오염을 제거하면서 교회 전체의 개혁 과정을 주도했다.
따라서 루터와 다른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의롭게 되는지에 관한 올바르지 않은 가르침이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끊어내고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강한 구원자라는 해결책
강한 교회의 문제에 대한 개혁자들의 대답은, 권위 있는 성경에 있는 강한 구세주이다. 요한일서 1:1~4를 살펴보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한편 개혁자들은 그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와 기독론적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참 하나님과 참 사람)을 가지셨다는 것은 개혁자들이 계속하여 견지해 온 고전적인 기독론의 가르침이었다.
요한이 언급하는 것처럼 이 아들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나 또한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 되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는, 오직 그분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자 총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새롭게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종교 개혁자들이 그들의 설교와 저술에서 붓을 들고 구원이라는 그림 전체를 오직 그리스도로만 채우는 것과 같았다. 아주 작은 붓질로라도 로마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을 그 그림에 넣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구원의 그림을 오염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을 채우기 위해 어디로 갔는가? 각각의 솔라(solas)는 첫 번째 솔라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의존한다. 오직 성경에서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일서로 갔다. 요한일서가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시작하여 우상을 멀리하라는 경고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씀하시는 골로새서 2:9절로 갔다. 성육신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한 위격 안에 있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시다. 그분은 모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능하신 중보로 간극을 메우셔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완전한 인성뿐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the whole fullness of deity)”도 존재한다. 종교개혁의 복음은 구원의 충만함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A theology of the Cross)
우리의 공허한 행위나 거짓 중재자를 구원의 그림에 더한다면, 루터가 설교한 “십자가의 신학” 대신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른 것을 설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강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것이 교회를 유혹하고 있지는 않는가?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항상,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오염되지 않은 구원의 그림을 오염시키는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께 가려고 할 때, 십자가를 우회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인간의 장치를 삽입한다.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16세기에도 필요했고 21세기에도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다름 아닌 오직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중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권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