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위격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2022년 07월 02일
그리스도의 백성
2022년 07월 15일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2022년 07월 02일
그리스도의 백성
2022년 07월 15일

그리스도의 위격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세 번째 글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성육신) 왕이심을 강조하기에 적절한 시기이다. 하지만 이런 시기적절한 강조가 없다라도, 그리스도는 왕이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제사장(그리고 예언자)이시다.

구약성경의 제사장들, 특히 대제사장들은 희생 제사를 드렸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레 16:15, 21).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였다(히 5:1). 구약 성경의 대제사장들의 계승은 한 명의 영광스러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인간(God-man)이시기도 했다(히 8:6; 딤전 2:5). 게다가 그분은 동물이나 곡식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하나의 영원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히 7:27; 9:12). 마지막으로 그분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약하고 효과없는 기도를 드리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고 효력있는 기도를 하셨고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5:7, 7:25).

요한복음 17장에서 성부에게 드리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제자들과 그 이후의 모든 신자를 위한 간구를 포함한다. 하지만 특별히 요한복음 17:1~8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중재적 역할들을 계시하신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참 하나님과 참 인간으로서 그분의 위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부와 맺고 계신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신다. 요한복음 17:1~8에 대한 주석을 마친 후 이 글에서 나는 이런 중재적 역할과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에 관해 성부와 그리스도 사이의 협정에 관해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믿도록 권할 것이다.

요한복음 17:1~8절 주석

그리스도는 “아버지”로 기도를 시작하시고 자신을 “아들”(17:1)로 언급하신다. 이 말씀은 놀랍게도 영원한 과거에서 확장하여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계속되는 성부와 성자의 위격 사이의 긴밀하고 사랑하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관계를 반영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점에 비해,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첫번째 말씀은 불길한 내용을 전한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2:4, 12:23)을 의미한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첫 번째 요청 또는 간구를 하신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런 서로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표면상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가오는 흉측한 십자가형과 관련있기 때문이다(이런 상호 영화는 또한 성령을 포함 한다; 16:14).

천국에는 과거 영원 전의 그리스도의 영광과 비슷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성육신 이전의 영원하고 신성한 아들로서가 아닌,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호 영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간구는 이전에 주어진 것에 근거를 둔다. 성부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와 택한 자들을 주셨다. 이는 성자가 자신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 함이다(17:2). 이 기도에서는 “주신”이라는 말이 유독 눈에 띈다. 성자가 택함 받은 자들에게 줄 수 있도록 성부가 아들에게 이런 것을 주는 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사전 협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게다가 하나님이신 성자는 영원부터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이 모든 권위를 주는 것은 중재적 역할로서 아들을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으로서 언급하심이 틀림없다. 

다음으로 “영생”을 정의한다. 선택받은 자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17:3). 성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보다 덜 신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요한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가 완전히 신성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1:1; 5:18; 10:30; 17:5; 20:28). 대신 요점은 다음과 같다. 참으로 신성한 성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부가 참으로 신성한 그리스도와 맺고 계신 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칭호는 흥미롭다. 그리스도는 “성부가 보내신” 분이다. 

17:4절에서 그리스도는 사전 협정에 따라 자신이 하신 일을 진술한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그리스도는 이런 사실을 목요일 밤에 언급하고 계시지만, 그는 금요일에 일어날 십자가 사건까지 염두에 두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이 세상에서”). 물론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는 동안 자신이 성취한 희생 사역을 적용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자신의 사역을 말씀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승천에 대한 미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5) 요한복음에서 다시 그리스도의 신성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다. 게다가 영광의 다른 측면이 여기에서 암시된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하고 신성한 성자이셨을 때는 영원한 과거에 영광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낮아지심의 상태에서 그가 가졌던 영광의 다른 측면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천국에는 영원 전의 것과 비슷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성육신 이전의 영원하고 신성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 약속의 일부는 성부가 성자에게 한 백성을 주고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는 그들이 믿도록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7:9-19에는 명백히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관련된 간구가 포함되어 있다. 요한복음 17:6-8에는 성부가 왜 간구를 허락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일부 근거나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고”(6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6절).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진술한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절). 즉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은 성부에 의한 것이었다. 제자들은 성자에게 주어졌다. 제자들은 적절하게 반응했다. 따라서 이 협정의 일부는 성부가 성자에게 한 백성을 주고 성부와 성자(그리고 성령)는 그들이 믿도록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협정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요한복음 17:1~8은 택함 받은 자의 구원과 관련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협정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 협정이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예를 들어, 3:34; 14:26; 15:26; 16:13~15). 이 협정은 다양한 이름으로 진행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 협약을 주로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평화의 의논(슥 6:13) 또는 팍튬 살루티스(pactum salutis)라고 불렀다. 

성경 전체의 함의를 고려하여 간단히 말하면, 구속 언약은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영원한 과거에 이루어진 삼위일체 내의 협약이다. 이 협약은 약속, 주어진 일, 성취해야 할 일, 보내시는 분(아버지와 아들), 보내심을 받는 자 (아들과 성령), 그리스도가 성육신하고 택한 자들을 대표하시겠다는 동의, 상호 영화 등을 포함한다. 영원한 과거에 이루어졌지만 이 협정은 신-인이신 그리스도의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관련 있다.

그렇다면 구속 언약은 은혜 언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은혜 언약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택함 받은 자 사이에 있었던 시간상의 협정이다. 하지만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념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협정/언약이 아닌, 하나로 보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은 구속 언약이 은혜 언약에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대부분이 두 견해 사이의 차이점은 언어적인 것이 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 17:1~8절에 나오는 삼위일체 내의 협약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성부는 그리스도에게 몇 가지를 주셨는데, 특별히 택한 자들을 주셨다(17:2, 6; 또한 6:39; 10:29를 보라). 성부는 그 택한 자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17:2)와 “말씀들”을 주셨다(8절; 3:34절을 보라). 마지막으로 성부는 그리스도에게 “일”을 주셨다. 그런데 이 일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셔야 했던 모든 일을 요약한다(17:4, 4:34, 5:36-37). 그리스도에게 일을 주는 것 외에도, 성부는 그리스도를 “보내셨고”(17:3, 8),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1절, 8:54를 보라).

요한복음 17:1~8에서 그리스도는 택함 받은 자들을 받으시고 그들을 적절히 돌보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주신다.” 그리스도는 택하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고(17:2; 또한 6:40; 10:28을 보라), 그들에게 성부의 “말씀”을 주신다(17:6; 1:1; 3:34를 보라). 또한 성부와 성령과 함께 그 택한 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것이고, “진리를 알 것이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을 것”임을 보증하신다.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한 그분의 특별한 제사장 직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 처형의 굴욕을 견디는 것(“때가 이르렀사오니”; 17:1)과 그들을 위한 그분의 기도를 포함했다(6~9절).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자들을 대표하시고 그들을 위해 죽으셔야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협정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내용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성부와 더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으며 성부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일을 이루어” 성부를 “영화롭게 되셨다.”(4절; 9:4)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17:6; 10:25를 보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17:3). 의미심장하게도 요한복음에서 “보내다”라는 동사는 정확하게 58회사용된다. (“보내다”라는 영어 단어 이면에는 실제로 두 개의 헬라어 단어인 펨프(pemp) [31회]와 어포스텔(apostell) [27회]이 있다. 이 두 단어는 사실상 요한복음에서는 동의어이다.) “보내다”라는 단어는 삼위일체의 위격 사이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 성부는 그리스도(3:17; 5:36; 7:28; 요일 4:9 참조)와 성령(14:26; 15:26)을 보내시고,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신다(15:26; 16:7; 계 5:6). 이것이 충분하지 않았느냐, 신자들 또한 파송의 한 부분을 담당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13:20, 17:18)

이런 사실을 잘 인식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는 종종 성부에 대한 칭호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예를 들어, 5:23∼24; 6:38, 44; 8:16; 12:45; 14:24; 16:5).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네 번이나 아버지가 보내신 자라는 별칭을 사용하셨다(3:34; 5:38; 6:29; 17:3).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해 “그가 보내신 자”(17:3)라고 묘사하셨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째,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 그분을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운다. 삼위일체와 관련을 맺지 않는 그리스도는 절대 그리스도가 아니다. 성부와 성령과의 형식적인 관계만을 가진 그리스도는 단지 형식적인 그리스도일 뿐이다. 성경의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의 완전한 교제와 관계에 의해 정의된 그리스도시다.

둘째,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 사명이 삼위일체 사역의 일부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부가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신다. 구원의 계획과 실행은 삼위일체적이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동일한 사역을 하신다. 하지만 각 위격은 위격의 뚜렷한 위격성에 적합하고 다른 두 위격과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일하게 사역하신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 사역을 하시는 분은 단 하나의 신적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다양한 “보내심”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성부께서 보내셨고,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누구신가?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다. 이런 보내심의 목적은 무엇인가? 택함 받은 자들의 구원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보내심이 내적 삼위일체와 맺고 있는 관계를 고려할 때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더 신비로운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보내심에 관한 함의에 도달하기 전에 몇 가지 배경이 도움이 된다. 교회가 오랫동안 이야기해 온 것처럼 삼위일체 위격들의 내적 관계는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외적 사역의 특별한 근거가 된다. 즉, 삼위일체 각 위격의 창조와 구속의 역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항상 존재했던 관계와 유사하다. 성경에서 이러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 관계에서 외적 사역을, 그리고 외적 사역에서 내적 관계를 조심스럽게 관련시켜볼 수 있다. 특별히 구속에 있어 그리스도의 역할을 고려할 때 몇 가지 주의사항이 필요하다. 내적 관계와 외적 사역 사이의 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1)구속 언약 (2)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으로서의 중재적 역할을 통해서 “여과”되어야 한다.

우리 구원의 계획과 실행은 삼위일체적이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내적 관계와 외적 사역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보내심”에 적용되는가? 요한복음에서 내적 관계와 외적 보내심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령에게서 발출된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가 밖으로 보내신 성령과 일치한다(15:26).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는 성부에 의해 영원히 발생하고/낳으심(generated/begotten)을 받는다(5:26). 이것은 성부가 성자를 외부로 보내신 것과 일치한다(7:29; 8:42). 이런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나는 오직 한 가지 함의만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에 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건대 우리는 신적 위격은 보내질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부에 의한 성자의 영원한 발생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성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 상응하는 진리를 확증한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것

요한복음 17:8절에서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 그리스도는 성부에게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성경에서 지식은 단순히 지적인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과 신뢰가 연결되어 있는 지식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측면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또는 다시 기억하거나 추가로 확증하는 것)은 그분을 더 깊이 알고/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17:1~8절에 나오는 진실과 실체는 너무 놀라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적 삼위일체의 실제에 대한 중요한 진리들을 배운다. 상호 영화, 구속 언약, 보내는 관계가 존재한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배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다. 그는 아버지로 인해 보냄을 받으셨고(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신다), 기꺼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배운다. 여기서 구원은 “영생”(3절)으로 불린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며, 받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다(2절). 그것은 우리가 삼위일체적 “말씀”을 행복하게 “지키고” “받는” 생명이며(6, 8; 16:12~15를 보라),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더 알고 믿으며, 영광 속에서 그분을 뵙기를 고대하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또한 그분을 본받는 것이다(13:15). 요한복음 17:1~8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부(그리고 성령)와 함께하는 모습은 적절한 자격과 함께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상호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주신다(11:41~42). 그리스도는 소통하셨고 기꺼이 다른 분을 영화롭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보냄을 받기도 하셨고, 보내기도 하셨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일을 성취해내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기도하셨다. 그분은 기꺼이 은사를 받기도 하셨고 주기도 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셨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요한복음 17:1~8절을 사용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성부가 보내신 제사장인 아들을 더 깊이 알고 믿게 하여 주옵소서.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로버트 카라
로버트 카라
로버트 카라(Robert J. Cara) 박사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Charlotte, N.C)에 있는 개혁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교무처장, 최고 학술 책임자(chief academic officer), Hugh and Sallie Reaves 신약 성경 교수이다. 그는 Cracking the Foundation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과 곧 출간될 히브리서 주석서의 저자이다.